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 10점
은희경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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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것, 그것이 내가 이번 여행에서 기대하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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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은 하나의 장르라는 신형철의 극찬이 아니었대도 나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데에 그리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좀더 냉정해지자면, 은희경은 은희경이고 공지영은 공지영이며 신경숙은 신경숙, 전경린은 전경린이다.

은희경 특유의 냉소와 위악. 그것은 곧 인간의 고독을 표현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인간의 고독. 유진, K, 소녀B, M 그리고 두 명의 나. 그들은 모두, 집요하게 원점 O에서 P점의 좌표를 찾던 P선배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은 모두가 슬픈 사회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더듬고 있는 건 아닐까. 때론 회피하면서, 가끔은 절망하면서, 또 항상 씩씩함을 가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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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ː거[過去] 명사
없으면 그럭저럭 아쉬우나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을,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결국엔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먼지 가득한 창고.
회상[回想] 명사
불현듯 그 창고 속 무언가가 당장 있어야 할 것처럼 꿈에라도 나오는 까닭에 자다 나온 차림에라도 온 데를 뒤져서 기어코 찾아낸 무엇. 먼지를 탁탁 털어 손으로 쓱쓱 문질러 보고는 슬며시 짓는 안도의 미소.

그러므로 누군가의 과거, 어둡고 쾌쾌하고 어지럽혀진 과거라는 창고 속에서 언제고 떠올려지지 않은 채 방치된 선택받지 못한 그의 다른 이름들.

예전엔 무얼 하셨어요, 라는 말은 당신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요, 라는 내 최선의 제스처다. 거의 언제나, 이력서 문구에 조사와 동사만을 인색하게 보탠 대답이 돌아올 것을 잘 알면서. 그 짧은 이력에 함축된 젊은 그의 시간을 마음껏 상상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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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의 코스모나츠

제6장 잘 가라, 내 청춘
스물일곱살의 소련 중위 유리 가가린은 아침 아홉시쯤 지구를 출발했다. 인류가 우주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쪽’이라는 뜻의 1인승 비행선 보스또끄 안에서 가가린은 우주복을 통해 산소를 마셨다. 우주공간에 이르자 그는 모태 속의 태아처럼 유영했는데 태어날 준비를 하는 아기처럼 가가린 역시 숨을 죽인 채 팔을 내저었다. 지구로부터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깊은 암흑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는 가가린은 이미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로부터 이탈해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둡고 가벼워서 거의 허무에 가까웠다. 불안하고 고독했다. 그때에 유리 가가린의 눈앞에 빛을 머금은 행성이 나타났다. 검은 허공으로 가득 찬 우주 한가운데 신비롭게 떠 있는 아름다운 별. 가가린은 전율했다. 나는 저 별을 보기 위해서 우주를 뚫고 그렇게 먼 거리를 가로질러 왔던 것일까. 마침내 유리 가가린은 자신이 떠나왔으며 그리고 다시 태어나게 될 별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961년 4월 12일, 지구는 푸른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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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ddin  |  2008/04/2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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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02:52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재밌는 책이군여
2010/01/13 18:16 수정/삭제
가슴이 싸~ 해지는 책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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