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화

[타인] yours  |  2006/03/01 10:42

[일기] Diary  |  2006/02/26 01:18

한국일보 기획취재팀=고재학(팀장)ㆍ조철환ㆍ이동훈ㆍ박원기기자 news@hk.co.kr

"수능점수에 차이가 없는데도, 남녀공학에서 여고남저가 뚜렷한 이유는 내신평가가 여학생에게 유리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성(性)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게임이나 운동에 몰입하는 성향이 강한 남학생이 학습태도와 과제물 제출 등 성실성이 강조되는 수행평가에서 밀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여고남저는 창의력과 응용력, 문제해결능력보다 성실성을 중시하는 수행평가 제도가 만들어낸 일종의 착시 현상인 셈이다."

어제 이 기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는데, 간신히 잘 참고 넘겼더니
오늘 은하님 블로그에서 또 이 기사와 관련된 포스팅이 있었다는... ;;
댓글을 달다가 너무 화가 나서.. 어제 기사를 처음 봤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어디 신문에 누구야?" 되물으면서 바이라인을 한참이나 봤었다는..
(솔직히, 혹시 '조선일보' 아니야? 이런 오해도..ㅎ 아무튼 한국일보답다)

수준미달의 찌라시에는 더 이상의 대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 분노가 너무 과분하다.

[횡포] Hey,  |  2006/02/20 14:22

 

‘꽃’으로 살기도 어렵다
‘뉴라이트’라는 ‘이름’ 붙이기에 대하여

다소 고답적이기는 하지만, 계절에 맞게 ‘꽃 이야기’ 한번 해 볼까요.

지금 제 책상 위에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습니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저’의 ‘장미’이지요. 장미는 어느 꽃집에나 수두룩하게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장미라는 일반적인 이름이 붙여진 채 놓여 있을 따름이지요.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으면 아마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고, 쓰레기장으로 직행할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해 작고한 시인 김춘수(1922-2004)의 가장 유명한 시는 「꽃」입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연배들은, 중, 고등학교 시절 이 시를 ‘연애시’로 읽고 공책 한구석에 시 전문을 베껴 두었던 낭만적인 기억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 중에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야 ‘꽃’이 된다는군요.
음,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이라!

캠퍼스 곳곳에 그 강렬한 향이 특징인 라일락이 꽃 봉오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정녕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낭만적인 연애와 자유에 대한 몽상이 떠오를 법한 풍경이지요.
‘연애, 자유’!, 참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연애, 자유’, 이런 2음절어가 주는 매력은 탁 내뱉고 입을 닫아버린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괜한 말의 여운을 만들지 않는 데 오히려 산뜻하고 냉정한 맛이 있지요. 우리말만 그런가 했더니 ‘프랑스 말에서 위대한 말, 시적으로 지배력을 가진 말들은 두 음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자유 !, 참 좋지요. 만해처럼 불교적 형이상학의 깊은 품을 갖지 못한, 저 같은 범상인으로서는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라고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자유! 라고 한번 말해 보십시오. 순간, 우리 스스로 내면적인 자유를 좀 얻은 듯하지 않습니까. 일상이 아무리 너저분해도 말입니다.

요즘 ‘자유주의’, ‘뉴라이트’ 라는 말이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뉴라이트 운동’을 표방한 자유주의 연대를 비롯한 몇몇 단체의 활동 때문인 듯합니다. 제가 쓰는 이 칼럼의 ‘거주지’도 ‘뉴라이트 웹진’이지요. 그런데 이 ‘뉴라이트’를 놓고 말이 많습니다. ‘자유주의 연대가 뉴라이트의 소유권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자유주의 연대를 향해 ‘뉴라이트가 당신들의 독과점 품목이냐’ 공격합니다. 자유주의 연대에서는 그들을 향해 ‘당신들이 뉴라이트를 표방할 자격이 있느냐’ 라고 비판합니다. ‘뉴라이트’를 길거리의 ‘흥행물 천사’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자유주의’든 ‘뉴라이트’든 무슨 꾸어다 놓은 보릿짝이 아닌 바에야, 오뉴월 땡볕 아래 늘어 놓아야 제 맛이지요. 요즘처럼 흑백 논리와 독선과 아집의 담론이 거센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지요.‘자유주의’ 든, ‘뉴라이트’든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말이고, 또‘만인의 것’이어야 하는 법이지요. 이는 ‘공자, 맹자 말씀’일 정도로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논란이 나오는 것일까요. 이 논란은 ‘이름 짓기와 부르기’의 전략과 관계있는 듯합니다. 서두에서 말한 김춘수 식으로 보자면요. ‘뉴라이트’가 누구나의 것일 ‘수’는 있지만 또 그렇다고 누구나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뉴라이트’운동은 작년 11월 자유주의 연대 창립을 시점으로 대중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져, 그 이념과 정체성이 비교적 뚜렷하게 각인된 운동입니다. ‘뉴라이트’하면 이제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특정한 단체의 목적과 성격과 지향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에서 그 사람의 외모와 성격, 그 사람과 관련된 특정한 이미지를 선명히 기억해 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말하자면 ‘자유주의 연대’와 ‘뉴라이트’ 사이에는 이미 어떤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뉴 라이트의 이름에 무임승차하지 말라’는 것은 이 같은 ‘이름 짓기와 부르기’가 작동하는 원리에 근거한 주장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역사상 ‘자유주의’나 ‘라이트’를 표방한 정치 집단이나 각종 단체들이 얼마나 많이 명멸했는지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자유주의’를 말할 수 있고, 말해 왔으며, ‘뉴라이트’를 표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뉴라이트’는 자유주의 연대 등 특정한 단체들이 ‘이름’을 붙인 뒤, 세인들에게 그 ‘이름’이 각인되고 통용된, 바로 그 특정한 ‘이름’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전까지 그 어느 것에도 이 ‘뉴라이트’라는‘이름’이 붙여진 적은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이름’으로 불려진 적도 없었던 것이지요.

자유주의 연대가 표방한 ‘뉴라이트’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처음으로 특정한 ‘빛깔과 향기’를 지닌 운동이자 ‘의미있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유주의 연대가, 자유주의 연대의 정체성과 다르다고 판단되는 단체에서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사용하자,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다른 이름을 붙이라’고 요구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지만, ‘꽃되기’도 어렵고 ‘꽃으로 살기’는 더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이제는 뉴라이트인가?!
이 글은 왠지 민태원의 「청춘예찬」과 느낌이 비슷하다. 별로 낭만적이지 못한 현실이 '꽃'처럼 예쁘게 포장되었지만. 한때는 소위 지식인들 사이에서 리버럴리스트로 불리길 희망했던 것이 아마 유행이었던 것 같다. 특히 유학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리버럴"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하면) 해방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에는 "뉴라이트"에 속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서로 뉴라이트라며 불길처럼 번지는 저속한 유행으로 또 맥없이 시들어가지는 않을까 우려가 된다. "뉴라이트", 참 멋진 말이다. 또 그만큼 어려운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는 "네오콘"이니, "진보" 성향이라는 표현은 지양하는 편이라는 거다. "진보"적이라는 표현을 쓰면, 학자가 중립을 지키지 못한다고 손가락질 당하고, 섣불리 보수라는 표현을 썼다가는 "수구보수"라고 손가락질 당하기 쉽상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만큼 신념이 강한 지식인도 드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김규항의 명쾌한 표현대로,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라고 푸념했던 것이 생각난다. 매력적인 용어 덕을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아-

[타인] yours  |  2006/02/17 21:07
1. <1999년 3월 9일 화요일> 염치 - 씨네21

알고 보면 이번 스크린쿼터 파동이란 골 때리는 일이었다. 스크린쿼터는 GATT는 물론 그 후신인 WTO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문화적 예외 조항'으로 볼 때, 현재로선 어떤 '경제 논리'로도 축소나 폐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제가 안 되는 일이 문제가 된 셈이다. 내막은 문화 의식이 결여된 한국 공무원들이 '공정 무역'이라는 채찍과 '5억 달러 투자'(외자 유치!)라는 당근으로 꼬드기는 미국 공무원들에게 은근슬쩍 땅문서(스크린쿼터라는) 내주려다 소란이 난, '실화'보다는 '야담'에 가까운, 그런 일이었다.

영화인들은 전례 없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웠냐 하면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들이 놀랄 정도'라고 했다. 두 달이 넘게 계속된 영화인들의 싸움은 공무원들이 꼬리를 빼고 국회 결의안이 관철되고서야 일차 마무리되었다. 농성을 풀며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인들이 제아무리 열심히 싸웠던들 국민들이 외면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왜 이리도 민망한가.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 이번 싸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자본'으로 해석하는 참신함을 보인 영화인들은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이 진짜 독점자본과 싸울 때 무엇을 도왔던가.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경쟁력'을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길거리를 헤매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쟁력'을 유보하는 아량을 베풀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번도 사회적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사회적 혜택은 과연 공정한가.

이번 싸움을 통해 개발된 영화인들의 자기 논리가 전례 없이 정교함에도, 이번 싸움의 열기가 밥그릇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하고 일상의 우연에 천착한다는 지성파 감독까지 연단에 오르는 이변이 생길 리 있었겠는가.('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 나는 영화인들의 '경제 투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경제투쟁이 경제투쟁에 머물지 않기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남의 밥그릇도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울함과 고통을 이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재발견하여야 한다. 영화인들은 이번 싸움을 통해 지켜낸 스크린쿼터가 오로지 영화라는 업종에만 주어지는 소중한 혜택임을, 그들의 장사가 매우 특별한 장사임을 다시금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지만, 오히려 '염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족 : 이 만큼 말하고도, 내 속은 여전히 찜찜하다. 한국 영화인들이 농성장에서 함께 흘린 눈물은 모두 같은가. 영화 자본가의 눈물과 영화 노동자의 눈물은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연대하는가. 싸움의 성과로 얻어지는 산업적 이익은 함께 흘린 눈물처럼 공정하게 분배되는가. 한국영화인들은 같은 민족인 동시에 같은 계급인가.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상식선'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2. <2006년 2월 7일 화요일> 그 후 7년

스크린쿼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7년 전에 「염치」라는 글을 썼었고 그 후 새로 보탤 이야기는 찾지 못했다.” 그나저나 ‘한국영화인들’과 ‘한국영화계’는 그 후 7년을 어떻게들 살아왔다더라..


3. <2006년 2월 8일 수요일> 그래서

"그래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찬성하는가?"

물론 아니다.
내 식구가 얄밉다고 남에게 넘길 수야..


※ 김규항 글을 보며 든 스크린쿼터 생각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서 김규항이 정책적 비판을 시도한 적은 없다. 사실 많이 회자화되었던 저 유명한 「염치」라는 글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화인들의 얕은 정치의식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식은 언제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지켜져왔다. 그동안 그들의 정치의식이 미천하고, 때로는 반동적이기까지 했더라도 지난 날만을 들추어내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김규항 뿐 아니라 최근, 졸지에 스크린쿼터 축소 진영의 대표 논객격이 된 조희문 역시 영화인의 도덕성 검증에 힘을 실었던 만큼 이제는 정책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즉, 최민식 시나리오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진짜 전문가의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그의 비극적인 시나리오의 결말은 정말로 유효한가. 혹은 스크린쿼터 문제가 진실로 범국민적 위기인가 하는.

[타인] yours  |  2006/02/16 12:59

이어서 음악듣기

[일기] Diary  |  2006/02/12 14:50
블로그 업뎃 작업 중입니다.

사실은 계획 하에 이루어진 업뎃이라기보다는, 우스운 컴퓨터 실력으로 인해 지난 자료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작업 중입니다. 블로그 틀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포스팅 작업이 미비한 관계로 한동안은 심심한 블로그가 될 것 같습니다. (원래도 '바쁜' 블로그는 못 되었으나-)

기존의 포스팅 일부를 수정하여 개시하고, 나머지는 새로운 포스팅으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오늘 오랫만에 컴퓨터 업글을 하면서 제대로 백업을 하지 않아서인지 자꾸 헤매네요.
중요한 데이터들은 일부 백업을 해 두었다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는데 이거 웬걸,
미처 백업 못한 곳 채우고 정리하느라 블로그도 제일 나중에나 볼 여유가 생겼다는..;;

백업을 미처 하지 못한 자료가 산더미같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저 아차 싶었고,
블로그는 그마저도 통채로 날리게 되자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금방 평온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정리를 잘하지 못해 차라리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며 위안을 삼았거든요.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구요.
[공지] 알림글  |  2006/02/12 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