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 일본 야마자키 토요코(山崎豊子)의 1969년작『白い巨塔』을 원작으로 아직 소설이 연재 중이던 시기인 1966년 영화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4차례 TV드라마 <아사히TV> 2회(1967년, 1990년), <후지TV> 2회(1978년, 2003년)와 1차례 라디오 드라마(일본 <문화방송>, 1965년)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후 2004년 대만을 시작으로 2006년 중국과 한국(케이블채널 스토리온)에서 방영되었으며, 1월 21일부터는 국내 케이블방송 <OCN>에서 다시 한 번 방송되고 있다. 어찌 보면 30여년이라는 생명력을 가진 작품으로 ‘원작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하얀거탑은 기존의 우리 드라마들의 무용성까지 내던지며, 진정한 드라마라는 찬사를 받는데 어색하지 않다. 상투적인 멜로전선도 아니요, 울긋불긋한 사극도 아니요, 다시 말하면 쓰기 편한 그럴듯한 사랑얘기도 아니요, 불편한 정치드라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얀거탑은 사랑타령도 아니면서 본인이 감탄을 금치 못한 ‘제5공화국’과 같은 정통 정치드라마와 같은 부담스러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어려운 얘기들은 의학적 용어라서 흘겨 들을 만하고 대부분의 얘기들은 공교롭게도 내 일 아니면 한 다리 건너 들을만한 흔한 인생사이다. 인간이란 영악한 동물이라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고, 눈을 감을 힘마저 없어지는 그날까지 야망을 품고 살아간다 해도 충분한 변론이 될 수 있을까. 아무튼 희미하게나마, 그러나 누구나 반드시 품고 사는 야망의 힘만으로도 하얀거탑은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하얀거탑은 의학·정치드라마다. 하얀거탑은 원작에서부터 순수한 의학드라마, 정치드라마이기를 표방하지 않았다. 그러니 성급한 시청자들이 장르의 정체성을 논하며, 정치드라마에서 의학드라마로 전환되는 시점을 최도영(원작: 사토미 슈지)의 부각으로 보았던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드라마는 처음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이 두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물론 원작이, 의학계의 이면과 함께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그리려 했다고는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 후자는 의학계를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 얻는 부수적 효과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리메이크작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의 하자가 있는 작품이다. 드라마로 각색된 작품들 모두가 원작을 그대로 살리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가 대표적이다. 즉, 원작 자체가 1969년 이전의 일본 의학계를 토대로 설정되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이를 최신으로 갱신하려 하더라도 원작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정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정치․경제․문화 등의 다양한 배경들을 통해서 한 사회의 특정 계층이 구조화되므로 일본적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털어버릴 수 없었다. 물론 해결방안은 있었다. 원작을 다소 훼손하더라도 시대를 2000년대의 한국으로 완전히 재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단순히 원작을 훼손하는 것 뿐 아니라 하얀거탑의 메리트를 거의 살릴 수가 없다. 1960년대. 그 시대는 일명 일본의 단카이(團塊) 세대가 이끌어가던 시기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60~70년대에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70~80년대의 경제성장을 이끌었으며 2007년부터 이들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되는 세대. 즉, 격동의 일본사회 속에서 잡초와 같은 삶의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또 그 야망을 이루던 세대. 이 극적인 시대상이 원작이 갖는 탁월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의학드라마적 특성으로서 드라마의 큰 줄기가 되는 의료사고 분쟁 사건의 의학적 취약성, 등장인물의 불균형성 등을 들 수 있다. 하얀거탑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유효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하얀거탑에서 선한 캐릭터는 모두 연약하다. 그들은 굳은 신념은 가지고 있지만, 설득력 있게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한다. 시민운동을 한다는 이윤진(원작: 아즈마 사에코)은 의료사고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 좀 더 의학적이어야 하고 좀 더 이성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 불의에 대항할 때에 주로 감정에 호소하게 되는데, 베테랑 시민운동가라는 그가 이런 아마추어적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시민운동가라면 그러한 부조리한 사회에서 일방적인 인명피해를 당한 구조적인 현실에 분노해야 하고, 그 구조적인 현실을 이성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자신의 신념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감정은 다분히 진실의 힘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 ‘센티멘탈은 혁명의 적이다’라는 말은 본인의 동의여부를 떠나서 충분히 타당한 표현이다.

  권순일의 유가족들이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감정에만 호소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리얼리티에 가깝다. 본인도 미천하지만 의료사고 관련 운동을 했었던 입장에서 지켜본 바로, 끔찍한 인명피해를 당한 유가족들이 이성적이길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당신의 희망에 가깝다. 남들이 보기에 실제 의료사고 분쟁에서 가장 유가족들이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은 바로 유가족들이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꼴 같지도 않은 병원 측의 협상카드에 드디어 손을 들었을 때이다. 본인은 이것이 타협이 아니라 좌절 혹은 절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야ː망[野望] 명사
  1)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
  2) 원해서는 안 되는 일을 바라는 지나친 욕망.
  3) 분에 넘치는 큰 포부.

  사람들이 하얀거탑에 열광하는 것은 강자에의 동경 때문이다. 사람들은 장준혁(원작: 자이젠 고로)과 같은 인간 부류를 현실사회에서는 누구보다 증오하면서도 정작 극중에서는 끊임없는 응원을 보낸다. 그래서 남성들은 마치 이러한 야망이 사회에의 노출도가 높은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열광하고, 사람들은 결말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장준혁이 개과천선을 할지언정 몰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이 하얀거탑을 단순히 드라마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 우리 사회는 부조리에 이미 너무 익숙해있다.

  다행히도 이런 야망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들은 대개 파국의 결말을 선택해왔다. 이러한 결말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허망하면서도 무상함을 느끼게 하고, 교육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시 시간이 지나면 끊임없이 또 잘못된 야망을 품고 몰락하는 한 인물에 열광하고 또 너무 상투적이어서 저질이라는 삼류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훔치고, 연인들은 사랑고백을 한다.

  하얀거탑은 흔한 표현이지만, 권선징악적이라기보다는 인과응보적이다. 권선징악의 테마에서 선은 항상 승리해야 하는 당위적인 과제이지만, 인과응보의 테마는 좀 더 공정한 게임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예측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100년이라는 인생은 길다. 항상 옳은 일만을 하고, 항상 착하게만 살 수는 없지만 요행을 바라고 한 치 앞만을 보는 술수만으로 우리의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의 일생, 인생은 길다.

[횡포] Hey,  |  2007/02/2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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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6 00:22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좋은 글이네요.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읽고 갑니다. :)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좋아하지만 우연히 본
MBC에 방영 중인 하얀거탑의 느낌은 뭐랄까
전체적으로 진지함이 과다하여 활력이 없는 기분이랄까요?
진지함 보다는 시청자로 하여금 무언가 과도한 압박을 주게 만드는 것
같은 기분에 즐겨보고 있진 않고 있네요.

무튼 복잡한 요즘 생각도 많은데 이 글이 파이프 놓기 게임에서의
한 조각 파이프 처럼 제 생각의 흐름을 움직이게 해주는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
2007/02/26 12:31 수정/삭제
얘기하려는 부분만 다루다 보니 못 쓴 내용이 많아서, 더할까 지울까 하다가.. ^^
(과찬 감사합니다. 그럴만한 글이 아닌데... ㅠ.ㅠ)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의 몰락은 개인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고,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라는 캐릭터는 현재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당시 격동했던 일본사회의 조류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진실이라는) 정의의 힘에 못 이겨 속속 옳은 길로 돌아서는 과정은 좀 진부하지만..

초기 총20회 기획 중 이제 16회가 방영되었으니 4회(2주분)가 남았네요.
파국의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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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6 21:07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하얀거탑을 TV에서 방영할때 1회부터 본게 아니라서 최근에 와서 제가 못 봤던 내용들을 봤습니다. 요즘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흰우유님의 글을 보고 제가 몰랐던 여러가지 이야기를 알게되었습니다.
무언가 감상 포인트도 잡은 느낌이구요^^ㅋ
2007/02/26 23:01 수정/삭제
에고.. 이런 과찬들.. 감사하면서도 송구한 마음이..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라면 포스팅 만족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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